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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 여인의 향기
이수광 | 미루북스 | 2011-12-03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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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 여인의 향기
이수광 | 미루북스 | 2011-12-03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26가지 향기를 간직한 사랑이야기, 애사
조선 시대의 여성들은 어떤 사랑을 했을까? 《조선 여인의 향기》는 그에 대한 궁금증을 말끔히 해결해줄 것이다. 이 책은 조선 여인들의 사랑과 삶을 통해 조선사회를 살피고 있다. 조선 시대를 관통해 온 지배 이데올로기는 ‘예(禮)’인데, 예를 중시하는 조선사회는 여인들에게 정절을 강요해왔다. 여인들은 철저하게 부모와 남성, 그리고 자식을 위해 희생해야 했다. 어려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혼인을 한 뒤에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자식을 낳은 뒤에는 자식을 따르는 삼종지도(三從之道)를 철저하게 지켜야 했다. 많은 여성들이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정체성을 찾으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때로는 한 떨기 꽃처럼 아름답게 피고 때로는 찬 서리에 지는 단풍처럼 안타까운 삶을 마감했다. 이처럼 조선 시대의 예는 여인들에게 씌워진 굴레였다. 저자 이수광은 조선의 여인들을 매난국죽(梅蘭菊竹)으로 표현하고 있다. 매화의 은은한 향기를 간직한 여인, 난초의 그윽한 향기를 간직한 여인, 국화의 깨끗한 향기를 간직한 여인, 대나무의 푸르른 향기를 간직한 여인을, 이 책의 4부로 구성해 다루었다. 왕비에서 천민 여성까지 조선여인 26인의 사랑과 한을 유려한 문체로 복원한 것이다. 글의 이해를 돕는 그림과 사진 등을 수록한 올 컬러 편집 팩션 역사서인 이 책은 조선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묘사한 16컷의 삽화를 수록했다. 수채화의 색감을 풍부하게 살린 이도헌 화백이 이 책의 삽화를 그려 조선여인들의 향기를 잘 전달하고 있다. 역사의 책갈피 속에 묻혀 있던 여인들의 모습이 이 책의 삽화를 통해 생생히 다가올 것이다. 또한 이 책에는 사진 10컷을 수록했는데, 이 사진들은 저자가 직접 역사의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촬영한 것들이다. 저자가 이 작품에 얼마나 많은 열정을 쏟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남성 위주의 신분사회에서 소외된 여성을 세상의 중심에 세우다! 조선 시대 여인들은 어떻게 사랑을 했고 어떻게 살았을까? 또한 그녀들의 삶에는 어떤 애환이 있었을까? 이 책은 철저한 남성 위주의 신분사회에서 가슴 절절한 사랑을 했던 조선의 여인들, 역사에 그다지 이름이 거론되지 않았던 여인들의 이야기와 기록만을 취합해 조선 시대를 애(愛)와 애(哀)의 관점에서 살피고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그동안 역사서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루어졌거나 이름조차 남아 있지 않은 인물들이다. 단 한 번 사랑을 나누었기 때문에 평생 동안 님을 그리워하면서 절개를 지킨 여인,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목숨까지 버려야 했던 여인들의 이야기다. 조선 시대의 여인들이라고 하면 우리는 얼핏 기생이나 궁중 암투밖에 떠올리지 않는다. 그러나 첩으로 불리는 많은 여인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권력자들이나 부자들은 부귀를 이용해 15, 16세의 어린 소녀들을 첩으로 거느렸다. 가난 때문에 첩이 되어야 했던 여인들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며 살았을까? 천민들에게도 사랑과 애환이 있었다. 기근이 들어 함경도에서 충청도 단양까지 내려와 구걸행각을 하던 함흥의 한 여인이 남편이 전염병으로 죽자 충청도 단양에서 함흥까지 천릿길을 관을 이고 가서 장례를 지냈고, 강원도의 한 초부(樵夫, 나무꾼)가 갑자기 내린 눈으로 동사를 하게 되자 그의 아내가 찾아가서 저고리를 벗어 덮어주고 알몸으로 몸을 녹여주어 소생시키려다가 함께 동사한 이야기는 지극한 사랑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조선사회에서는 얼굴이 예쁜 것도 죄가 되었다. 숙종 시대에 예조판서를 지낸 오정창의 딸이자 한림 정한주의 부인인 오(吳) 씨는 얼굴이 너무 예쁘다고 해서 시집에서 구박을 받다가 아버지가 역모로 몰리자 결국 쫓겨났다. 아버지의 귀양길에 남편이 찾아오자 부둥켜안고 울던 오 씨는 적삼에 혈서를 써서 남편에게 주고 자결한다. 애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이 책은 역사의 비주류였던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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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 인물 청문회
윤용철 | 말글빛냄 | 2013-07-12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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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 인물 청문회
윤용철 | 말글빛냄 | 2013-07-12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그들을 불러내어 역사 앞에 다시 세우다
조선을 움직인 23인의 사후 기록과 조선왕조실록에 숨겨진 그들의 진실 이 책은 정확한 역사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졸기’를 바탕으로 집필된 책이다. 졸기는 한 인물이 사망했을 때 사관史官이 그에 대해 인적 사항, 출생과 죽음의 과정, 성장 과정, 학문의 정도, 벼슬살이의 과정, 인물의 됨됨이, 평생의 업적, 저서, 후손 등을 소상히 밝힌 기록물이다. 오늘날의 《추모록》이라 할 수 있다. 실록에 오른 기록인 만큼 역사적으로 중요하고 대부분 높은 벼슬을 한 관리, 문인, 무인, 학자 등이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의 유명인사 2,125명에 대한 졸기를 수록하고 있으며, 해당 인사에 대한 출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이 2,125명 중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고 조선 역사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23인을 선정해 각 인물에 대한 사실을 추적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잘못 알고 있는 것을 모두 파헤쳤다. 이를 위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해당 인사의 졸기를 원문 국역(국사편찬위원회 번역)으로 서두에 배치하고 그 다음에 졸기에 나타난 내용을 실록의 기록에서 구체적으로 검색하여 기술했다. 가급적 그 인물의 업적과 과오 그리고 사건에 대해 저자의 주관적인 입장을 개진하지 않으려 노력했으며, 따라서 실록에 나타난 기록에 의거해 객관적 사실 전달에 주력하고자 했다. 실록의 기록에서 졸기만큼 중요한 것이 해당 인물에 대한 ‘탄핵 상소문’이다. 주요 인사들에 대한 탄핵 상소문은 그 개인의 삶과 인격, 나아가 그에 대한 당시의 여론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물론 탄핵 상소문이라는 것이 과過를 묻고자 하는 것일 뿐, 공功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상소문의 내용을 가지고 탄핵 당사자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를 한다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다. 그러나 한 시대를 책임졌던 인물들에 대한 평가는 공보다는 과에 대해 세밀한 잣대를 들이댈 수밖에 없고, 그 과를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삶의 교훈을 얻고자 함이기 때문에 탄핵 상소문에 나타난 내용을 중요하게 다룰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졸기와 탄핵 상소문을 바탕으로 한 인물에 대한 삶을 조명하고, 역사적 사실을 밝히며, 그것을 통해 올바른 평가를 할 수 있도록 엮었다. 이 책에 실린 인물들은 고려 말의 이색에서부터 성리학의 거두 이황에 이르기까지 시대적으로 중요한 문신, 학자, 선비 등을 소개했다. 이를 통해 조선의 성립 과정과 역사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주요 인물소개 “이 색” 독살인가, 자연사인가 고려 말의 문신, 학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그는 이성계의 조선이 개국한 뒤 그의 요청을 물리치고 고려에의 충절을 지켰다. “이색은 변론하고 분석하며 절충하는데 저물도록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기억하고 외우기만 하는 습관과 공리功利의 학설이 점점 없어지고, 성리학이 다시 일어났다.” 이색은 국운이 다한 고려의 끝에서 나라의 걱정에 수심이 가득하여 애틋하고 착잡한 심정으로 시를 읊었다.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흘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이성계와 그의 추종 세력들에 의해 조선이 개국되면서 고려에 충절을 다하고자 했던 이색의 많은 친구와 제자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왕조가 바뀌는 격변의 시기에도 살아남았음은 고려에서뿐만이 아니라 중국에서까지 그 명성이 높았기 때문일 것이다. 1392년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자 이색은 불사이군의 충절로 태조의 손을 뿌리치고 고향인 한산으로 돌아간다. 그는 한산 이씨의 시조이다. 후손들에게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이성계가 어느 날 낙향해 있는 이색을 찾아와 도움을 청했다고 한다. “나를 버리지 말아주게.” 친구의 이 말에 목은은 “나라 안에 내가 앉을 곳이 없잖소. 망국의 신하는 그저 낙향해 있다가 죽으면 해골을 가져다 고산에 묻을 뿐이오.” 라고 대답했다. 이러한 독야청청하고 대나무처럼 굳게 변함없는 절개를 지키며 살다가 이색은 여주 신륵사에 눈을 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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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은 뇌물천하였다
정구선 | 팬덤북스 | 2012-03-26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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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은 뇌물천하였다
정구선 | 팬덤북스 | 2012-03-26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조선시대 관료들의 뇌물수수는 임금 세종도 막지 못했다!”
조선시대의 뇌물 세태를 통해 현 정치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 왕조가 바뀌어도 뇌물 풍조는 계속되었다 - 대신들의 뇌물수수는 임금 세종도 막지 못했다 - 중앙 요직에 앉아서도 마음은 뇌물 밭에 …… - 노비마저도 상전에게서 배운 것은 뇌물수수였다 조선시대의 뇌물 세태를 통해 현 정치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현재 대한민국은 공직사회를 비롯하여 사회 전 분야에 걸쳐 뇌물수수 및 공여 등의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다. 근래에 발생한 부산 저축은행 사태, 대통령 친인측의 청탁비리, 공무원들의 뇌물수수, 스포츠계의 승부조작 등은 그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뿐이다. 사실 이런 뇌물수수와 청탁비리 등으로 인한 정치사회의 부패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조선시대에도 오늘날만큼 부정한 청탁과 뇌물수수 및 뇌물제공이 공공연하게 만연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뇌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임금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조선시대, 특히 조선 초기(태조~성종)에 만연했던 뇌물수수 사건들을 통해서, 2012년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사회에도 변함없이 뿌리 깊이 박혀 있는 뇌물 풍조에 경종을 울리고자 한다. 지금도 청탁이나 뇌물 제공 등으로 부정한 목적을 달성하려는 자들이 이 책을 읽고 역사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고 반성하는 계기가 된다면, 이 책의 집필 의도가 어느 정도 달성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중앙 권력자부터 노비까지 뿌리박힌 뇌물수수 관행 우리가 집중적으로 조명할 조선 초기(태조~성종)에는 뇌물이 공공연했다고 할 정도로 그야말로 뇌물 풍조가 만연하였다. 위로는 중앙의 권력자들인 정승 · 판서 · 참판으로부터 아래로는 내시와 아전에 이르기까지 뇌물을 받아 챙겼다. 심지어는 노비조차도 뇌물을 받았다. 또한 지방에서는 관찰사나 수령들이 집중적으로 뇌물을 받았다. 관찰사는 수령들에게서 뇌물을 받았고, 수령들은 상인이나 백성들에게서 뇌물을 거둬들였다. 문관만이 아니라 무관들도 뇌물을 받았고, 중국에 파견되는 사신들이 상인들에게 뇌물을 요구했으며, 후궁이나 임금의 유모 중에도 이것을 받은 이들이 있었다. 심지어는 범죄자를 다스리는 포졸과 곤장을 치는 나장들까지도 뇌물을 받는 실정이었다. 중앙과 지방의 최하급관리라고 할 수 있는 아전들은 선상노비選上奴婢 선정, 공물 수납, 부역 부과 등과 관련하여 뇌물을 챙겼다. 그밖에 조선에 파견된 중국의 사신들이 이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렇게 뇌물을 주고받는 일이 많다 보니 이와 관련된 무고나 탄핵이 난무하여 깨끗한 사람들이 애꿎은 피해를 보는 경우도 많았다. 어떤 사람들이 뇌물을 바쳤을까? 당시에는 지방의 관찰사나 수령들이 집중적으로 뇌물을 바쳤다. 관찰사들은 중앙의 권세가들에게 줄을 대어 출셋길을 마련하기 위해 뇌물을 주었고, 수령들도 권세가들에게 뇌물을 주어 중앙으로 진출하려고 하였으며, 자신들의 고과성적을 매기는 관찰사들에게도 뇌물을 바쳤다. 그 밖에도 죄수 · 상인 등이 뇌물을 제공했고, 특히 외교적인 목적을 달성하려는 일본인들과 귀순하려는 여진족이 조선 관리들에게 뇌물을 바치는 일도 있었다. 사회 전반이 이렇다 보니 당시에는 특이하게도 뇌물을 전달하는 뇌물 브로커나 소송이나 고소를 업으로 삼는 자들까지도 있었다. 그들은 왜 뇌물을 주었을까? 우선 인사청탁을 위해서 이조 판서나 재상 등에게 뇌물을 바치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그 다음은 요즈음처럼 군대 징집을 면제받으려고 하거나, 세금 감면, 형벌 감형, 재판 승소 등을 위해서 뇌물을 제공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뇌물의 액수에 따라 뇌물을 받은 본인은 최고 사형, 중노동을 시키는 도형徒刑, 곤장으로 볼기를 치던 장형杖刑, 작은 매로 볼기를 치는 태형笞刑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죄인의 얼굴이나 팔뚝에 살을 따고 홈을 내어 먹물로 죄명을 찍어 넣는 자자형刺字刑을 가할 수도 있었다. 뇌물을 주거나 받은 본인만이 아니라 그 자손에게도 연좌제를 적용하여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고, 요직으로 나갈 수 없도록 막았다. 또한 뇌물을 받은 자와 함께 뇌물을 준 자도 아울러 처벌하게 되어 있었고, 뇌물을 주거나 받은 자를 천거한 사람도 벌을 주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이렇게 뇌물과 관련된 범죄에 대하여 엄중한 처벌을 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이것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특히 임금의 총애를 받는 대신이나 중신들의 경우 불문에 부쳐지거나 경미한 처벌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처벌이 미온적이다 보니 뇌물비리가 만연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조선을 뒤흔든 뇌물 사건들 - 임금이 지시한 뇌물금지 및 처벌법을 우습게 안 대신들 세종 6년(1424) 7월에 임금은 대신이나 조정 관리 중에 뇌물을 받는 자가 많아 이를 엄하게 금지하는 법과 뇌물을 받은 자와 준 자를 처벌하는 법을 세우도록 지시했다. 그러자 영의정 유정현은 “나 같은 늙은 자가 음식물을 받는 것이 무엇이 해로울 것이 있겠소.”라고 했으며, 대제학 변계량과 이조 판서 허조도 이에 동조하여 “먹는 물건을 주고받는 것은 해로울 것이 없을 것 같은데 하필 금할 것이 있겠소.(《세종실록》권25, 6년 7월 14일 정해)”라고 말했다. 이렇듯 당시에도 대신들은 뇌물에 대한 인식이 아주 흐릿했다. - 임금 세종의 조말생 뇌물 무마 사건 장원급제자로 태종과 세종의 총애를 받은 대제학 조말생. 하지만 그의 뇌물 연류는 조선 천하가 알고 있는 사건이었다. 병조판서를 재직할 때에는 뇌물을 받고 소송 판결을 지연했고, 토지를 받고 관등을 올려준 부당한 인사 사건 등을 저질렀다. 충신들은 그를 죽어도 그의 죄가 남을 법하다며 상소를 올렸으나, 임금 세종은 그를 선왕 태종이 총애했던 인물로 공로가 있다하여 귀양을 보는 걸로 뇌물 사건을 무마했다. - 신숙주의 아들 신정, 뇌물 대가로 사약을 받은 사건 세조의 공신 훈구파의 신숙주. 그의 아들 신정은 탐욕스럽기가 끝이 없었다 한다. 신숙주는 입버릇처럼 “우리 집을 패망시킬 자는 반드시 이 자식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과거시험에서도 친구 양수사의 답안을 베껴 썼다. 하지만 세조는 그가 신숙주의 아들임을 알고 합격시켰다. 결국 그는 성종 13년(1482) 4월에 뇌물을 받고 관인을 위조하여 임금을 속인 죄로 사약을 마시고 비운을 맞게 된다. - 후궁의 부친이 뇌물을 받고 권력을 휘두르다 조선 초기 태종의 후궁인 숙공궁주의 아버지 김점은 평안도 관찰사로 재직할 때, 직접 자기 침실 안으로 드나들게 하여 뇌물을 받았으며, 벼슬을 돈을 받고 팔기도 하고 옥사도 봐주기도 했다. 심지어 죄수들까지 뇌물로 석방시키는 일이 허다했다. 그가 평안도 관찰사를 관둘 때, 뇌물을 운반하기 위해 3번이나 이사를 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관직에서 물러나도 받은 뇌물은 변함없이 남아 있는 법이다. 예나지금이나 공직자는 뇌물로 퇴임 후를 준비한다. - 뇌물로 군역도 면제받다 장수나 만호 등 무관들의 뇌물수수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태조 7년(1398) 2월 경기도 관찰사 박경의 보고에 의하면, 각 도의 여러 진에 배치된 무관인 만호와 천호 들이 자기가 관할하는 수군들 가운데 부유한 자에게는 뇌물을 받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따라서 정작 국경을 지킨 자들은 가난한 사람과 아이, 그리고 늙은이들뿐이었다고 한다. - 암행어사 출두도 미리 알려 피하게 했다 성종 20년(1489) 11월 사간원 헌납 윤긍 등이 암행어사를 보내어 수령들을 규찰할 것을 임금에게 청했다. 하지만 어사는 어느 지역에 들어가기도 전에 앞질러 소식이 전파되어 고을 수령에게 알려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어사가 데리고 다니는 서리(아전)들이 암행어사의 위엄을 빌어 권세를 빙자하여 고을 수령을 위협하여 뇌물을 낚아채는 대신, 암행어사의 출두 시점을 미리 알려주었다고 한다. 요즘 경찰의 업소 단속 세태와 비슷하지 않은가! - 뇌물이 통하지 않았던 사람들 30여 년 동안 정승으로 있으면서 한결같이 청렴하기만 했던 정창손. 그는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을 고변한 김질의 장인으로서 세조 때 영의정을 지냈다. 성종 18년(1487) 1월 향년 86세로 정창손이 세상을 떠나자, 임금은 청빈한 재상이니 부의 물품을 넉넉히 주도록 명했다. 그의 시호가 충정忠貞인데, 그가 도를 곱게 지키고 굽히지 않은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성종 때 이조와 병조 판서 등을 역임한 이숭원도 뇌물이 통하지 않았던 청백리였다. 그는 예조 참판 이보의 아들로서 문관에 장원급제하여, 사제감 주부에 임명되고, 바로 사간원 정언으로 전직되었다. 그후 사헌부 지평, 이조 정랑, 장례원 판결사, 좌승지, 평안도 관찰사, 이조 판서 등을 거쳤지만, 집안은 가난하기 그지없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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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의 르네상스인 중인
허경진 | ㈜알에이치코리아 | 2010-04-27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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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의 르네상스인 중인
허경진 | ㈜알에이치코리아 | 2010-04-27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시대의 中心에 中人이 있었다!
조선 후기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현상들이 존재했던 시기였다. 중국의 고증학에 영향을 받은 실사구시 학풍(실학)과 천주교의 유입 및 중인 계급의 성장은, 300년 넘게 이어져온 유교적 사회 질서를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정조대왕 집권기로 대표되는 이 시기를 유럽의 르네상스나 계몽주의와도 비교하는데, 이것은 그 당시가 문화적으로 많은 시도가 행해졌던 시기였을 뿐 아니라, 근대화로 가는 중요한 가교였기 때문이다. 특히 전문직에 종사한 중인의 활약은 실로 대단했다. 당시 중인은 신분적으로 사대부 양반 계층에 훨씬 미치지 못하면서도, 평민이나 심지어 천민에게도 존중 받지 못한 경계인이었다. 그럼에도 중인 가운데는 문·사·철을 뛰어넘는 비범함으로 문예부흥과 근대화를 주도했던 인물이 여럿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의료(의원)·법률(율관)·금융(계사)·외교(역관)·천문과학(관상감)·언론(박문국) 등의 전문지식에서 미술(화원)·음악(악생·악공)·문학 등의 예술에 이르기까지, 촉망받는 모든 분야의 중심에 조선의 르네상스를 꽃피운 중인이 있었다. 좁고 지저분한 거리를 배회하던 ‘반쪽 양반’ 실학자 이중환은 인문지리서 「택리지」의 서론인 ‘사민총론’에서 백성을 사(士)·농(農)·공(工)·상(商) 으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옛날에는 사대부가 따로 없었고, 모두 백성(民)이었다. 백성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선비가 어질고 덕이 있으면 임금이 벼슬을 시켰고, 벼슬하지 못한 자는 농사를 짓거나 장인(匠人)이 되거나 장사꾼이 되었다. 즉, 이중환은 사·농·공·상을 신분으로 보지 않고 직업으로 보면서, “사대부라고 하여 농·공·상을 업신여기거나 농·공·상이 되었다고 사대부를 부러워한다면, 이는 모두 근본을 모르는 자들이다”라고 하였다. _385쪽 참조 그러나 이중환의 이러한 논지는 당시 신분 차별이 매우 심각했음을 방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특히 사·농·공·상으로 나눈 이중환의 분류 어디에도 중인이 속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결국 조선시대 신분 차별의 본질은 어정쩡한 경계인으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중인의 사회적 정체성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흔히 ‘반쪽 양반’이라 불리는 서얼은 육조(六曹)와 삼사(三司) 등의 중앙 관직으로 진출하는 것이 제도적으로 금지되었기에, 대부분 역관·의원·율관·산관·화원 등의 기술직 관원이나 하급 행정 관리인 경아전과 서리에 종사했다. 서얼 출신이 기술직 관원이나 하급 행정 관리가 되면 그 후손들도 대를 이어 하급 관리에 진출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다. 서얼 출신의 관리가 나라에 큰 공을 세워 고관으로 승진하여 양반 신분을 얻기란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하급 관리로라도 가계를 이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이들도 자연스럽게 하나의 신분층을 형성하게 되면서 중인 계급을 이루게 된 것이다. 중인은 왕의 주치의인 어의, 도화서 화원, 외국에 파견되는 사신을 통역하는 역관, 호조와 형조에 근무하는 서리와 율관 등 왕실 및 조정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직업적 특성 때문에, 생활 터전도 궁궐 근처에 있어야 했다. 따라서 많은 중인들이 궁궐 뒤 인왕산 기슭 굽이진 골짜기나 청개천 일대의 좁은 골목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중인을 위항인(委巷人)이라 부르게 된 것은, ‘마을 가운데 꼬불꼬불한(委) 작은 길가(巷)에 사는 사람(人)'이라는 뜻으로, 그들의 거처에 따른 것이다. _15쪽, 388쪽 참조 일과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계급의 질곡에 맞서다 중인은 비록 왕실과 사대부 양반을 보좌하거나 나라의 한직을 채우는 인물로 취급받았지만, 그들의 일과 예술에 대한 열정은 실로 대단했다. 중인은 특히 자신들이 살았던 인왕산을 배경으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등 다양한 예술적 활동을 꽃피웠다. 수려한 경관으로 한양 최고의 명승지로 꼽히던 인왕산은 신분 차별과 격무에 지친 중인들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중인은 인왕산 기슭에 그들만의 서재를 꾸미고 그곳에서 문학동인이자 문화공동체인 시사(詩社)를 결성하여, 시를 지으며 한평생 풍류를 즐기며 살았다. 시사 가운데 특히 돋보였던 모임은 서당 훈장 천수경과 출판편집인 장혼, 명필가 마성린을 주축으로 결성된 ‘송석원시사’였다. _25쪽 참조 당시 문인들이 송석원시사에 초청받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 정도로 장안의 화제가 되자, 그 뒤로 직하시사, 벽오시사 등 많은 시사가 생겨나면서 조선 후기 서민문학을 주도해 나갔다. 시사에 속한 중인을 ‘위항시인’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들은 무기를 지니지 않고 흰 종이 위에 문장력을 겨룬다는 뜻인 ‘백전(白戰)’이라는 백일장을 열어 문학적 교류를 이어 갔다. 장혼이 송석원시사의 시선집 「옥계사」에 쓴 발문은 당시 중인의 끈끈한 문학적 연대를 가늠하게 한다. 장기나 바둑으로 (벗을) 사귀는 것은 하루를 가지 못하고 술과 여색으로 사귀는 것은 한 달을 가지 못하며 권세와 이익으로 사귀는 것도 한 해를 넘지 못한다. 오로지 문학으로 사귀는 것만이 영원하다. _23쪽 문학이 중인을 문화공동체로 결집시킨 과외 활동이었다면, 그림과 음악은 그들의 대표적인 직업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화원은 국내보다도 일본에서의 활약이 대단했는데, ‘달마도’로 유명한 신필(神筆) 김명국은 역관시인 홍세태와 함께 일본에 한류 열풍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당시 일본인은 조선의 문장가나 화원의 시와 그림에 광적으로 매료되었는데, 조선통신사 사절단으로 방문한 문장가와 화원은 가는 곳마다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국빈 대접을 받았다. _109쪽, 275쪽 참조 당시의 화원 가운데는 돈과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붓끝을 곧추세웠던 최북 같은 인물도 있었다. 그는 그림을 강요하는 양반 고관에 맞서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찔러가며 권력과 타협하지 않은 대쪽 같은 예술가였다. _132쪽 참조 중인의 전방위 재능과 비범함은 예술 분야에만 국한하지 않았다. 그들은 탁월한 외국어 실력과 열린 사고로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는 문화 메신저였고, 자신의 목숨을 걸고 전염병에 걸린 수많은 사람을 구해낸 용기 있는 히포크라테스였으며, 과학적 사고로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을 온몸으로 실천한 신지식인이었다. 성리학의 탁상공론에 빠져 정쟁만을 일삼던 사대부도 실천적 지식으로 무장하여 사회적 영향력이 커져가는 중인 계층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대의 메이저가 인정한 진정한 메이저 이처럼 당시 양반 사회에서는 중인 계층을 천하게 여기면서도 경계하는 분위기가 팽배했지만, 중인의 전문적 식견과 재능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몇몇 왕과 사대부는 중인의 비범한 재능과 실천적 사고를 높게 여기며 측근에 두고 교류하기도 하였다. 조선 최고의 명필 추사 김정희는 중인과 교류가 깊었던 양반 선각자이다. 서얼 출신 검서관 박제가의 제자이기도 한 추사는, 송석원시사의 좌장 천수경의 부탁으로 1미터가 넘는 화폭에 예서체로 ‘松石園’ 석 자를 써 주기도 했다. 추사는 또한 역관 오경석, 이상적, 화원 조희룡을 제자로 삼으며 친하게 지냈는데, 1840년경 제주도 유배지에 찾아온 이상적에게 그의 최고 걸작 ‘세한도’를 그려주기도 했다. _25쪽, 316쪽 참조 연암 박지원 역시 중인과 친분이 두터웠던 양반 실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실제로 연암의 소설에는 중인이 자주 등장하는데, ‘허생전’에서 가난한 양반 허생에게 밑천을 대준 변씨는 중인 출신 갑부 변승업의 조부를 모델로 한 인물이다. 연암은 요절한 천재 역관 이언적의 전기 ‘우상전’을 짓기도 했는데, 여기서 당시 일본에 파견하는 조선통신사에서 중인의 활약상을 다음과 같이 자세히 묘사하였다. _296쪽, 370쪽 참조 일본의 관백(關白)이 새로 정권을 잡으면, (먼저 조선통신사를 초청하기 위해) 저축을 늘이고 건물을 수리하고 선박을 손질했다. 또 속국의 여러 섬을 깎아 자기 소유로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검객·서화(書畵)·문학 등 여러 분야의 재능인을 모아 훈련 시켰다. 그런 지 몇 년 뒤에야 조선에 사신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마치 상국의 조명(詔命)을 기다리는 것같이 공손하였다. 그러면 우리 조정에서는 문신 가운데 3품 이하를 골라 삼사(三使)를 갖추어 보냈다. 이들을 수행하는 사람도 모두 말 잘하고 많이 아는 자들이었다. 천문·지리·산수·점술·의술·관상·무력에서부터 퉁소 잘 부는 사람, 술 잘 마시는 사람, 장기나 바둑을 잘 두는 사람, 말을 잘 타거나 활을 잘 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한 가지 기술로 나라 안에서 이름난 사람들을 뽑아 사절단에 포함 시켰다. 이처럼 중인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연암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그들의 탁월한 재능을 세상에 알린 것이다. 중인의 재능에 대한 신뢰는 양반뿐 아니라 왕이나 왕족에게서도 엿볼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정조이다. 정조는 당시 서얼금고법으로 인해 중인이 벼슬에 오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규장각에서 서적을 검토하고 필사하는 일을 하는 검서관직을 신설하여 서얼 출신 지식인을 등용하였다. 1779년에 임명된 초대 검서관이 바로 유득공·이덕무·박제가·서이수 네 사람이다. 당대에 가장 명망 있는 중인 출신인 이 네 명의 학자를 ‘4검서’라 불렀는데, 정조는 이들과 함께 신학문을 연구하면서 문예부흥의 초석을 쌓았다. _36쪽 참조 중인과 친분이 두터웠던 왕족 가운데는 뜻밖에도 흥선대원군이 있다. 대원군은 안동 김씨를 비롯한 권력층을 견제하기 위해 아전들에게 많은 권한을 주면서 수많은 중인 서리를 사조직으로 흡수하는, 이른바 ‘아전정치’를 폈다. 대원군은 중인을 정치적 야욕에 이용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만큼 중인 출신 관리들의 탁월한 행정 능력을 인정했던 것이다. 대원군은 중인 출신 서리 말고도 박효관, 안민영 등의 음악인과도 가깝게 지냈는데, 인왕산 필운대에 ‘운애산방’이라는 공간을 마련해주며 가객들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했다. 박효관은 대원군의 지원에 힘입어 「가곡원류」를 편찬하여 후세에 국악을 전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_34쪽, 165쪽 참조 이 밖에도 영조, 다산 정약용, 번암 채제공, 구암 허준, 겸재 정선 등 당대 최고의 인물 곁에는 항상 중인이 있었다. “인재는 인재를 알아본다.”는 말이 있듯이, 결국 시대를 이끈 주인공의 눈에는 또 다른 주인공이 들어왔던 것이다. 중인은 비록 신분의 벽에 막혀 세속적인 영예를 누리지는 못했지만, 시대를 이끈 메이저 사이에서는 중인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진정한 메이저였다. 부귀와 권력을 탐하지 않고 한평생 살맛나게 살면 ‘그만(而已)’인 삶 당시 중인 계층은 “신분에 제한 없이 실력에 따라 벼슬하게 해 달라.”며 조정에 여러 차례 상소를 올리기도 했지만, 그 방법이 폭력적이거나 과격하진 않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1851년 조정에 올린 상소문을 작성한 율관 장지완이다. 상소문을 이용한 일련의 중인 통청 운동은 지금으로 치면 민변이나 시민단체들이 벌이는 인권운동과도 흡사했는데, 실제로 정조는 중인의 상소에 귀 기울여 규장각에 검서관직을 신설하기도 했다. _232쪽 참조 그러나 중인의 통청 운동은 유럽의 시민혁명 등과 같은 계급투쟁의 모습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당시 사회적으로 계급의식이나 인권 개념이 낙후되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당시 중인 계층의 성향이 투쟁적이거나 권력지향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인 대부분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능력에 비한다면 턱없이 소박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물론 태어나면서 운명에 순응하며 살 수 밖에 없는 당시의 사회 제도적인 한계 탓도 있었지만, 그러한 사회적인 불만을 범죄 등의 일탈행위를 통해 터트리기 보다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일과 예술 활동으로 승화한 것이다. 인왕산을 주무대로 활동했던 위항시인이자 출판편집인 장혼이 시에 즐겨 썼던 ‘그만(而已)’이라는 표현은 당시 그들의 삶이 얼마나 관조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홀로 머물 때에는 낡은 거문고를 어루만지다 누워서 옛 책을 읽으면 그만이고, 마음 내키면 밖에 나가서 산기슭을 거닐면 그만이다. 손님이 오면 술상을 차리고 시를 읊으면 그만이고, 흥이 도도해지면 휘파람 불며 노래를 부르면 그만이다. 배가 고프면 내 밥을 먹으면 그만이고, 목이 마르면 내 우물의 물을 마시면 그만이다. 추위와 더위에 따라 내 옷을 입으면 그만이고, 해가 지면 내 집에서 쉬면 그만이다. 철저한 문헌 해석에 근거하여 풀어낸 최초의 ‘중인실록’ 최근 몇 년 동안 출판에서는 물론이고, 영화나 방송 등의 다양한 채널을 통해 역사에서 주목받지 못한 인물에 대한 조명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왕조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민초들 속에 숨겨져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찾아내 그들의 비범한 능력과 드라마틱한 삶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시도는 많은 사람에게 큰 호감을 불러 일으켰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역사 속 민초들에 대한 기록들을 모아 한권의 역사 논픽션으로 묶어 출판하면, 이를 바탕으로 흥미진진한 팩션문학이 생성되고, 또 이를 시나리오로 재구성하여 스팩터클한 미니시리즈나 영화로 제작되는 일련의 과정은, 이제 중요한 역사 콘텐츠 메이킹 시스템으로 정착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에서 심심찮게 발생되는 역사 왜곡은 매우 유감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즉, 주인공으로 재배치된 인물의 삶은 사료의 부족으로 인한 고증의 오류, 흥미유발을 위한 상업적 코드에 매몰되어, 치정(痴情)화 되거나 변질되고 만다. 결국 역사에 대한 다양성의 욕구가 지나쳐 역사 본연의 진실이 왜곡되어 버리는 것이다. 『조선의 르네상스인 중인』은 바로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면서 역사 콘텐츠의 지나친 상업적 코드화를 탈피한 역사 다큐멘터리를 지향한다. 이 책은 문헌의 철저한 해석에 근거하여 다양한 역사적 지층을 하나하나 고증해 역사 본연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풀어낸다. 문헌에 나와 있는 역사적 기록을 그대로 풀어내더라도 중인의 삶은 충분히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이기 때문에 그 어떤 재배치나 인위적 창작을 가미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고전 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저자 허경진 교수는, 조선 후기 위항문학을 연구하면서 수집한 수많은 중인 관련 기록과 문헌을 바탕으로, 이 책 『조선의 르네상스인 중인』이라는 이른바 ‘중인실록’을 엮어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많은 기록을 부지런히 찾아내어 정확하게 해석하고 냉정하게 고증하는 것이 역사적 글쓰기의 본령임을 제시한 것이다. 독자들은 그 어떤 재배치나 왜곡 없는, 사실 그대로의 역사 콘텐츠를 지향한 이 책의 텍스트 만으로도 인문적 소양은 물론, 중인의 곡진(曲盡)한 삶에 배어있는 드라마틱한 재미와 감동까지 충분히 향유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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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의 발칙한 지식인을 만나다
정구선 | 애플북스 | 2009-07-03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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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의 발칙한 지식인을 만나다
정구선 | 애플북스 | 2009-07-03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전하, 도대체 지금껏 무엇을 하셨나이까?
왕을 꾸짖은 조선의 미네르바! 헛된 것 가운데 가장 헛된 것이 권력 아닐까? 시대의 흐름 앞에 허무하게 무너지고 어제의 일인자가 오늘의 비참한 죄인이 되기도 하는 권력의 세계. 하지만 권력에 대한 야망은 쉽사리 뿌리치기 힘들다. 역사는 권력의 추이와 그것을 둘러싼 투쟁의 기록이고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반성하고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다면 역사는 권력에 의한, 권력을 위한, ‘권력의 역사力史’일 뿐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15명의 처사들의 모습은 현재 이슈가 되고 있는 정치와 권력, 언론 등의 문제들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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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의 방외지사
이수광 | 북큐브 | 2012-03-23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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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의 방외지사
이수광 | 북큐브 | 2012-03-23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왕명에도 굴복하지 않았던 아전, 중국의 사대정책에 반기를 든 역관, 왕실 여인들을 쥐락펴락 한 무당 등
방외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뜨거운 역사 <조선의 방외지사>는 조선시대 비주류들의 이야기를 통해 조선 민중사를 새롭게 살펴보는 책이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시대에 맞서 뜨거운 삶을 살았던 사람들을 통해 조선의 역사를 다채롭게 조명하고 있다. 내시, 궁녀, 첩, 역관, 의원, 예언가, 무인, 부랑자, 장인, 선비 이단아 등 조선의 체제에서 소외되고 핍박받았던 하층민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조선을 역동적으로 이끌어 간 주체 세력은 국왕이나 사대부들이 아니었다.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신분사회를 고착시킨 사대부들은 정치사를 이끌었을 뿐 민중사를 이끌지는 못했다. 민중사를 이끌고 조선의 역사를 다채롭게 만든 사람들은 신분적으로 천대받던 하층민들이었지만, 그들은 항상 역사의 이면에 가려져 조명받지 못했다. 이 책은 조선의 민중사를 이끌며 시대를 뜨겁게 호흡했지만, 주류로 편입되지 못하고 방외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는 열린 시각으로, 인생 자체가 아웃사이더인 낮은 신분의 사람들을 진정한 인사이드로 새롭게 평가한다. 희로애락을 마음껏 즐기며 살다 간 인간적인 그들의 삶을 통해 조선의 다채로운 역사를 만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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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의 암행어사
김영진 | 도서출판 큰방 | 2012-01-09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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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의 암행어사
김영진 | 도서출판 큰방 | 2012-01-09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우리나라의 야담과 전설의 진면목을 담은 이야기책. 야담과 전설, 해학 등이 골고루 어우러진 재미있고 구수한 이야기들을 통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꿰뚫는 선조들의 재치와 지혜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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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의 출셋길, 장원급제
정구선 | 팬덤북스 | 2010-07-23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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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의 출셋길, 장원급제
정구선 | 팬덤북스 | 2010-07-23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조선시대 선비들의 유일한 출셋길 장원급제,
그 영광과 좌절의 드라마를 읽는다!! 조선시대, 과거 시험1등이 인생에서도 1등이었을까? 조선시대의 과거 시험에도 커닝과 대리 시험이 존재했다? 조선시대의 장원급제는 출신성분과 집안의 재력으로 결정됐다? 세상만사 = 출세만세? “조선시대 고위 관료로 출세한 조상 분들의 묘를 보고 뿌듯해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습니다. … 어머님은 항상 저한테 ‘자네’라는 호칭을 쓰셨습니다. 이를테면 학창시절의 제게 ‘자네, 우리 집안에 정승이 3대째 끊긴 것을 아는가!’라는 식의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출세가 한국인을 가장 잘 들여다 볼 수 있는 키워드라고 생각합니다. 성공이라는 말에는 웃지만 출세에 대해서는 경계의 눈빛을 보이죠. 성공은 자기만족적이고 출세는 질투, 욕망, 선망 등 다양한 코드를 포함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앞의 글은 정운찬 총리가 서울대학교 총장 시절이었던 2004년,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이며, 뒤의 글은 지난 1월에 방영된 SBS 스페셜 <출세만세>를 제작한 남규홍 PD의 말이다. 두 인터뷰에서 볼 수 있듯,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키워드들 가운데 핵심 중의 핵심 키워드가 ‘출세’다. 출세는 개인에게 부와 명예를 주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혈통주의를 중시하는 사회적 특성 때문에 출세는 무엇보다 가문의 영광이다.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강준만 교수는 “출세! 이념보다 훨씬 강하고 진하고 질긴 한(恨)이다”라고 논했다. 우리는 애써 외면하든 피터지게 노력하든 사회적 인간으로서 출세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존재다. ‘세상만사 = 출세만세’라는 등식이 사회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출세욕을 가진 사람에 대해 이중적인 잣대를 댄다. 막연한 부드러움과 이유 없는 질시가 교차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두 성향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며, 현재의 한국을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이다. 출세는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조선 시대 선비들에게도 출세는 선비의 길이었으며 꿈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출셋길은 무엇이었을까? 출세로 가는 지름길, 장원급제 조선시대에서 평범한 선비들이 출세하는 유일한 길은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르는 것이었다. 조선팔도의 내로라하는 선비들이 오직 그날만을 위해 몇십 년간 갈고닦은 실력을 겨루어 당당히 과거에 급제, 그것도 으뜸 중의 으뜸인 장원급제를 하는 것은 개인의 영예일 뿐 아니라 가문의 영광이자 온 고을의 자랑이었다. 그러나 장원급제의 영광 뒤에는 무수한 삶의 굴곡이 숨어 있었으니, 과거 시험이나 장원급제를 둘러싼 극과 극의 인생 역정을 살펴보노라면 자연히 오늘날의 과도한 입시 전쟁이나 사회의 온갖 경쟁을 떠올리게 된다. 이 책은 500여 년간 조선 사회를 이끈 중심이었던 과거제도의 이모저모를 살펴보고, 천태만상의 부정행위와 제도적 한계로 끊임없이 임금과 관료들의 골머리를 썩인 과거제도의 명암을 두루 살펴본다. 또한 과거 시험이 낳은 조선 선비들의 다양한 인생 드라마와 굴곡 많은 삶을 살다 간 장원급제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시험에서 1등이 인생에서도 반드시 1등인지 질문을 던진다. 과거 시험의 이모저모 조선 시대의 과거 시험은 문과, 무과, 잡과로 나뉘어 시행되었고 문과는 다시 대과와 소과로 나뉘었다. 소과는 대과를 위한 예비시험 성격이었는데, 생원진사시 또는 사마시라고도 불렸다. 조선 시대에는 대과를 보통 문과라고 했으므로 문과에 급제하는 것은 양반 관료사회에 당당히 진입하기 위한 중요한 관문을 통과했다는 의미였다. 학자들마다 통계에 약간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조선 시대를 통틀어 문과 시험이 대략 744회 실시되어 급제자는 모두 만 4,620여 명이 나왔으며 장원급제자는 744명이었다. 문과 급제자 전체에 비하면 지극히 적은 숫자고, 1년에 장원급제자가 대략 1.4명 배출되었으니 정말 어려운 과정을 통과한 셈이다. 문과 급제는 개인의 영광뿐 아니라 가문의 커다란 영예였다. 급제만 해도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었는데 더구나 장원급제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조선 시대는 양반의 시대고, 양반 가운데도 소수의 문벌 가문이 지배한 사회였다. 그리고 권력의 중심에 접근하려면 무엇보다 문과에 급제해야 했다. 또한 대를 이어 문벌을 유지하려면 문과 급제가 필수였고, 이왕이면 장원급제를 기대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서울에 사는 문벌가의 자제들이 문과 장원으로 급제하는 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장원을 차지하려면 무엇보다 든든한 집안 배경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는데, 그러한 배경이 없는 시골의 가난한 선비들은 오로지 공부에 의지해야 했다. 게다가 그들은 어려운 현실을 벗어나 입신양명하려면 열심히 공부해서 급제하거나 장원이 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장원이 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어떤 이는 엄중한 금기를 깨고 불공을 드리기도 하고, 과거 시험만 보게 해준다면 개구멍이라도 지나겠다고 통사정을 하는가 하면, 신문고를 두드리는 이까지 있었다. 그리고 장원급제자들 가운데는 어렵다는 과거에 연달아 장원을 차지한 수재도 있었고 신동으로 이름을 날린 이들도 있었다. 부자지간 또는 아버지, 아들, 손자 3대가 모두 장원을 차지한 집안도 나왔다. 장원 중에는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장원을 차지한 인생 역전의 승부사들도 있었다. 서얼은 과거를 볼 수 없었지만 신분 제한을 뛰어넘어 장원급제까지 한 사람도 있었고, 여러 차례 낙방을 거듭하다가 장원을 하거나, 문과에 급제했다가 취소된 후 다시 시험을 보아 장원급제의 영광을 거머쥔 이들도 나왔다. 그 밖에 귀양살이를 한 뒤 분발하여 장원을 차지한 이도 있었다. 시험 1등이 인생에서도 1등은 아니다 장원급제자들은 으레 모두 순탄한 과정을 거쳐 출세하고 영달했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그들 가운데는 끈질긴 비판에 직면하거나 억울하게 정치적인 희생양이 된 이들도 있었으며 순탄치 못한 관직 생활을 이어간 이들도 있었다. 물론 국왕의 총애를 받거나 공신이 되고 정승, 판서까지 올라 영화를 누린 이들도 있었고 청렴강직한 자세로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받은 장원도 있었지만 말이다. 과거에서 장원급제했다고 인생에서도 반드시 장원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요즘 말로 과거 시험의 달인이 곧 인생의 달인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성경에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라는 구절이 있다. 장원이라고 자만에 빠져 나태하거나 불성실하게 생활하는 자들은 성실하고 끈기 있게 살아가는 비장원급제자들에게 추월당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대의 희생물이 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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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의 포청천 오리 이원익 대감 상
이우각 | 프로방스 | 2013-03-19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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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의 포청천 오리 이원익 대감 상
이우각 | 프로방스 | 2013-03-19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지금은 이원익 같은 진정한 푯대, 참 스타, 빛다운 길잡이가 없는가! 아아, 우리에게는 왜 여태 이원익의 닮은꼴, 이원익의 분신, 이원익의 그림자 정도라도 되는 걸출한 인물이 그리도 없는가!
나는 나날이 외로워지고 쓸쓸해지는 우리 국민을 위해 이원익을 소개한다. 나는 나날이 헐레벌떡거리고 허겁지겁 서두르는 우리 관료들을 위해 이원익을 소개한다. 나는 나날이 쥐꼬리만 한 거짓말을 키워 기린의 목만큼 늘이고 코끼리의 다리만큼 불리는 중앙과 지방의 목민관들을 위해 이원익을 소개한다. 나는 희망의 새싹들인 청소년들, 젊은이들을 위해 이원익을 특별히 높이고 싶다. 나는 어수선한 환경에서도 스스로 바로 살고 바로 서려 애쓰는 이 시대의 청장년층을 위해 이원익을 특별히 내세우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아무것도 해 줄 것 없는 나라를 위해 그래도 아침 저녁으로 하늘에 빌고 강과 산의 신명에게 비는 나와 같은 노년층을 위해 특별히 이원익이란 이름 석 자를 목청껏 외치고 싶다. 이원익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찾아보게 하고 싶다. 이원익의 발자취를 통해 참 희생, 참 헌신, 참 애국애족, 참 삶을 뒤밟게 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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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의 포청천 오리 이원익 대감 하
이우각 | 프로방스 | 2013-03-19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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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의 포청천 오리 이원익 대감 하
이우각 | 프로방스 | 2013-03-19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지금은 이원익 같은 진정한 푯대, 참 스타, 빛다운 길잡이가 없는가! 아아, 우리에게는 왜 여태 이원익의 닮은꼴, 이원익의 분신, 이원익의 그림자 정도라도 되는 걸출한 인물이 그리도 없는가!
나는 나날이 외로워지고 쓸쓸해지는 우리 국민을 위해 이원익을 소개한다. 나는 나날이 헐레벌떡거리고 허겁지겁 서두르는 우리 관료들을 위해 이원익을 소개한다. 나는 나날이 쥐꼬리만 한 거짓말을 키워 기린의 목만큼 늘이고 코끼리의 다리만큼 불리는 중앙과 지방의 목민관들을 위해 이원익을 소개한다. 나는 희망의 새싹들인 청소년들, 젊은이들을 위해 이원익을 특별히 높이고 싶다. 나는 어수선한 환경에서도 스스로 바로 살고 바로 서려 애쓰는 이 시대의 청장년층을 위해 이원익을 특별히 내세우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아무것도 해 줄 것 없는 나라를 위해 그래도 아침 저녁으로 하늘에 빌고 강과 산의 신명에게 비는 나와 같은 노년층을 위해 특별히 이원익이란 이름 석 자를 목청껏 외치고 싶다. 이원익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찾아보게 하고 싶다. 이원익의 발자취를 통해 참 희생, 참 헌신, 참 애국애족, 참 삶을 뒤밟게 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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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조
장야신 | 휘닉스드림 | 2012-02-03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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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조
장야신 | 휘닉스드림 | 2012-02-03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위대한 대왕, 조조의 모든 것을 말한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많은 업적을 남긴 최고의 CEO로 새롭게 조명되는 대왕 조조를 다이나믹하게 만난다. 장편 조조대전<曹操大傳>을 발표하여 조조의 권위자로 알려진 장야신이 심혈을 기우려 조조의 모든 것을 담아 집필한 역작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복잡하면서도 뚜렸한 조조의 사상, 성격, 작품 등을 종합해 정확히 서술하였으며, 조조의 발자취를 따라 한나라 말기에 진행되는 삼국시대의 경천동지할만한 정치, 군사 투쟁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천 년 동안 이어진 조조에 대한 평가를 조망하고, 조조가 예술적 이미지로 형성되고 발전하는 과정을 담았다. 또한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자료들을 바탕으로 역사의 깊이와 시대의 높은 평가를 근거로 삼아 탄탄하게 구성하고 흥미진진하게 서술하였다. 난세의 영웅인가, 치세의 간웅인가? “나는 천하를 가지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다” 대왕 조조는 다재다능한 장수이자 군주였고, 정치가이자 시인이었다. 그는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십으로 전장에서 지휘하면서 휘하 장수를 아꼈고, 인재를 목숨처럼 귀히 여겼다. 하지만 스스로 왕에 등극하여 한나라 왕실을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무고한 인명을 잔인하게 학살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조조의 다소 잔인하고 교활하기까지 한 단면들의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그가 이룩한 공적까지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있는 그대로의 진짜 조조의 모습을 통해 난세를 사는 최고 권력자로서 그가 짊어질 수밖에 없었던 고충과 군주이면서 아버지로서 겪어야 했던 갈등 등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조조는 특히 인재 등용에 있어서 오늘날 기업들이 유능하고 경력 있는 인재를 스카우트하는 것처럼 다른 나라 인재들을 과감하게 받아들였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사사로움에 연연하지 않는 그의 인재 등용은 장료, 우금, 장합, 서황 등과 같은 훌륭한 인재들을 만들어 냈다. 조조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높은 공을 세웠던 이러한 인재들이야말로 조조의 강력한 힘이었으며, 지금 우리에게도 필요한 사람의 능력이 어디까지인가를 알게 해준다. 걸출한 정치가이자 군사 전문가, 문학가이기도 한 조조는 군웅할거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그의 정치적, 군사적 재능은 정치, 경제 분야에서 특히 빛을 발했으며, 백성들의 바람에 부합하는 발전적이고 객관적인 정책을 실행했다. 천하를 건 전쟁에서 독보적으로 재능을 발휘한 조조는 우선 북쪽 지역을 통일하는 대업을 달성했다. 이로써 당시 중원 지역의 사회 경제가 회복하는 데 기본적인 여건을 만들어 냈고, 서진(西晉)이 나라를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왕 조조는 대혼란과 대분열의 역사를 끝내는 데 혁혁한 공적을 세운 인물이다. 천하의 정세가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이에 따라 끊임없이 인재들이 곳곳에서 배출되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났던 영웅이 바로 조조인 것이다. 따라서 굴곡 많고 신기한 색채가 농후한 그의 일생은 우리가 되돌아보고 탐구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한나라 말기 삼국 시대의 역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의 경험, 지혜, 교훈을 얻어, 민족 문화와 정신을 함양할 수 있을 것이다. 과감한 결단이 위기를 기회로 바꾼다! “내가 세상을 버릴지언정, 세상이 나를 버릴 수 없다” 조조의 가장 빛나는 결단은 한나라의 마지막 황제 헌제를 허창으로 모셔온 것이다. 동탁의 죽음 이후 마땅히 기거할 거처를 찾지 못하던 헌제를 두고 제후들은 각자 주판알을 튕겼다. 사실 헌제를 이용해 제후들을 호령하자는 계책을 먼저 내놓은 이는 원소의 참모 저수였다. 하지만 다른 참모들이 찬성하지 않아 원소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원소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조조는 헌제를 모셔오기로 결정하자마자 즉시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조조의 이 결단은 커다란 열매를 맺었다. 헌제를 모시고 있는 조조에게 대항하는 것은 곧 한나라 왕실에 대항하는 것이었고, 그의 허가가 없는 전쟁은 불법적인 군사 행동이었다. 조조가 천자의 깃발을 내세우자 제후들은 피동적이 될 수밖에 없었고, 주도권은 조조의 손에 있었다. 그는 최소한의 대가를 치르고 황제를 모심으로써 정치, 경제, 군사에서 최대 수익을 얻은 셈이다. 황제의 힘에 대해서 뒤늦게 깨달은 원소는 헌제를 자신의 본거지를 옮겨오려 했다. 그러자 조조는 원소에게 대장군 자리를 양보하고, 자신은 두 등급이나 강등했다. 이에 원소는 더 이상 헌제를 모셔오겠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조조는 이렇게 작은 것을 버려 더 큰 것을 얻은 것이다. “나는 오직 그 사람의 재능만을 보겠다!" 이렇게 말하는 조조의 결단력과 실행력은 실용성을 중시하는 그의 성격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성격은 인재 등용의 기준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인재를 등용했기 때문에 가장 많은 인재를 모을 수 있었다. 또 사사로움에 연연하지 않는 상과 벌의 엄격한 집행이 있었기에 다양한 인재들을 효율적으로 다스릴 수 있었다. 인재를 기용하여 천하를 얻고 재도를 개혁하여 민심을 얻다 “천하의 인재들이여, 다 나에게로 오라” 조조는 인재 기용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조조가 성공한 것도 적절한 인재를 제때 기용한 데 크게 힘입었다. 조조는 바른 생각으로 인재를 부리고 나아가 지력과 용력이 뛰어난 인재를 기용한다면 결국 천하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인재 한 사람을 얻을 때마다 크게 기뻐했다. 이렇게 모은 인재들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의견을 낼 것을 독려하고 자신과 다른 의견도 귀담아 들었으며 그들이 뛰어난 계책을 내놓으면 후하게 포상했다. 이는 조조의 신하들을 비롯하여 나라 전체를 고무시켰고 신하들이 조조를 믿고 따르게 하는 힘이 되었다. 조조가 인재를 판단하는 기준은 오로지 ‘재능’이었다. 직무에 맞는 개인의 장점과 특징이 가장 중요한 것이지 그 외의 사람됨이나 직무와 직접적으로 관련 없는 단점은 문제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삼국지 영웅들에게 볼 수 있는 인재경영의 스타일은 각자가 현저히 다른 면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손권의 경우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굳건한 인적자원이 기반이 되고 있는 상태였고, 유비의 경우는 당시 시대상에 맞지 않는 감성에 호소하는 인화를 바탕으로 인적자원을 만들어 갔다. 실례로 자신의 아들을 살리려고 적진을 뚫고 나온 조자룡 앞에서 자신의 못난 아들 때문에 훌륭한 장수를 잃을 뻔 했다는 말 한마디로 이미 조자룡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손권이 주어진 자원이 재산이었다면, 유비는 감성마케팅의 달인이었다. 이에 반해 조조의 인적자원은 철두철미한 계산에 따라 형성된 듯이 보이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손권과 유비의 장점을 취하면서도 조조만의 특색 있는 인적 네트워크를 만들어 갔다.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여 자신만의 원칙하에 시행하였다. 무엇보다 조조의 강점은 절대라든지 불변이라는 개념은 자리 잡고 있지 않았다. 조조는 임기응변의 대가였고 항상 열려있는 사고방식으로 일변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런 점이 조조 주위로 인재들이 몰려들게 하였고 그런 인재를 조조는 적극 활용했다. 자주 비견되지만 제갈량이 죽은 뒤 촉나라의 급격한 쇠퇴와는 달리 조조의 위나라는 철저한 인적자원의 구성으로 인해 한 개인의 공백이 조직자체를 뒤흔드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다. 바로 이점이 조조의 치밀한 인적 구성원들의 조정능력이었던 것이다. 조조는 군사,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전문가를 육성하는 멀티시스템을 가동했다. 왜, 다시 조조인가? “나는 전장을 누비면서도 시를 노래했다” 시를 좋아한 조조는 높은 수준의 다양한 작품을 남긴 문학가이자 예술가이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여유로운 생활 속에 학문과 문학을 쉽게 접할 수 있었고 스스로도 시문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열성적으로 창작하며 한 시대의 시풍을 열었다. 악부의 전통을 계승하고 오언시를 발전시켰으며 사언시를 활발하게 지어 냈고, 문학 작품 속에 문학적 견해를 구현하여 후대의 문학이 발전하는 데 교량 역할을 톡톡히 했다. 특히 조조는 새로운 형식의 사언시를 탄생시켰는데, 청나라 심덕잠은 이를 두고 “조조의 사언시는 『시경』과는 별도로 자신만의 기묘한 가락을 만들었다.”라고 평가했다. 중국 시가의 다양한 형식이 위나라 때인 조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조조는 이렇듯 뛰어난 정치가이자 경세가, 문학가였음에도 의심 많고 잔혹한 성격과 행동으로 역사상 많은 비판을 받았다. 특히 나관중의 『삼국연의』가 크게 인기를 끌면서 사람들에게 유비는 선, 조조는 악으로 각인되어 지금까지도 그 이미지가 이어져 왔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지』 관련 저서들이 꾸준히 읽히고 조조의 리더십이 주목 받기도 했지만, 정작 조조 생애의 다양한 면모를 모두 아울러 제대로 평가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조조가 한 시대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만한 역량이 있었음을 간과해선 안 되며, 그가 보여 줬던 단호한 결단과 혁신, 틀에 얽매이지 않는 인재 포용은 현대의 최고경영자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용인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조조가 한 나라를 경영하는 CEO로서 어떻게 자리매김되어 갔는지 관심있게 살펴보았다. 현대사회에서는 대통령도 한 국가를 경영하는 CEO라고 부른다. 그런 의미에서 조조는 뛰어난 CEO였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독자 여러분도 이 책을 CEO의 관점에서 본다면 좀더 흥미로워질 것이다. 2-3세기에 살았던 조조를 오늘의 관점에서 보지 않는다면 이 책은 무의미해질 것이다. 어떠한 역사이든 현대적 의미를 갖지 않는다면 박물관 소장품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절대 과거 유물로 남지 않는 인물, 지금도 우리 가슴속에 살아있는 조조의 모든 것을 지금부터 만나보기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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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중앙아메리카 치아빠스와 유까딴 여행에서 있었던 일
존 스티븐스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0-05-19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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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중앙아메리카 치아빠스와 유까딴 여행에서 있었던 일
존 스티븐스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0-05-19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마야문명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방대한 보고서
사람들은 마야문명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현재는 중앙아메리카의 유명 관광지로 명성을 떨치고 있지만, 예전에는 셀바(중앙아메리카 아열대숲) 속에 숨겨진 채 사람들과 단절되어 있었다. 이를 처음으로 대중들에게 소개한 책이 존 스티븐스와 프레더릭 캐서우드의 ≪중앙아메리카 치아빠스와 유까딴의 여행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 전에도 몇몇 탐험가나 군인들에 의해서 마야문명에 관한 보고가 있었으나, 이를 방대한 내용으로 현실감 넘치는 이야기로 접근한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 스티븐스는 1839∼1840년, 1841∼1842년, 두 번의 탐사를 했는데, 탐험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고고학 보고서의 느낌이 들 정도로 정확하게 유적을 묘사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책을 읽으면서 지금도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벨리세, 온두라스, 과테말라의 셀바에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나 메리다와 같은 유까딴 북부의 도시에서 벌어지는 축제, 입는 옷, 음악 등은 모두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다. 당시 탐험하면서 있었던 생생한 이야기와 온갖 유적에 대한 빼어난 묘사는 마치 우리가 마야에 와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생생한 현장 그림 이 책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스티븐스의 동반자 캐서우드의 그림이다. 당시 잡풀에 둘러싸이거나 나무 그늘에 숨어 있던 고대 유물을 그리기 위해 캐서우드는 잡풀을 제거하고 조명을 만드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하루 종일 불편한 자세로 그림을 그리는 데 전념하기도 한다. 이 책에서는 마야문명의 생생한 현장을 더욱 살리기 위해서 캐서우드의 그림을 싣고 있다. 캐서우드는 유적에 대한 세세한 그림을 그림으로써 지금 마야의 유적을 독자들 눈앞으로 옮겨오고 있다. 원전은 방대한 분량의 책이다. 이 책은 첫 번째 탐사에서의 유적지를 발견하는 흥미로운 과정과 유적에 대한 감동, 두 번째 탐사에서의 좀 더 냉정한 태도로 유적을 객관적인 태도로 보고하며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려는 저자의 의도를 최대한 살려 발췌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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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중앙아시아의 이해
박창규 | 써네스트 | 2011-11-01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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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중앙아시아의 이해
박창규 | 써네스트 | 2011-11-01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일본 홋카이도대학교 슬라브연구센터 연구원 박창규의 『중앙아시아의 이해』.
중앙아시아에 대한 입문서다. 중앙아시아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을 역사, 정치, 경제, 환경, 그리고 이슬람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중앙아시아를 처음으로 접하는 사람들이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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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지리산 킬링필드
강평원 | 선영사 | 2009-11-13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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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지리산 킬링필드
강평원 | 선영사 | 2009-11-13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북파공작원>의 작가 강평원이 밝히는 지리산 양민 학살 사건의 진실.
<지리산 킬링필드>는 저자가 2001년 9월부터 한국전쟁 당시 집단 살육과 양민 학살이 자행된 지리산 현지를 찾아가 가해자와 피해자 20여 명의 증언과 대담을 녹취한 후에 집필한 다큐멘터리 형식의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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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측천무후
도야마 군지 | 페이퍼로드 | 2013-04-13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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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측천무후
도야마 군지 | 페이퍼로드 | 2013-04-13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제국을 창업한 세계사 유일의 여황제 <측천무후>를 조명한 평전. 측천무후는 중국 3천 년의 역사를 통틀어 단 한 명뿐인 여제이다. 그녀는 고종의 황후가 된 뒤 남편인 고종이 죽자, 친자인 중종을 폐위시키고 예종을 즉위시킨 다음, 거센 반대를 누르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또한 국호를 당에서 주로 바꾸고, 퇴위에 이르기까지 15년간 주나라의 황제로 군림하였다.
이 평전은 세계사에서 유일무이하게 제국을 창업한 측천무후의 숨겨진 역사를 조명한다. 저자는 그녀의 긍정적인 면모를 부정하지 않지만, 다른 역사학자나 작가들처럼 예찬 일변도로 나오지도 않는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측천무후 업적의 상당 부분이 태종이 남긴 자산에 기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여성이 권력을 잡았다는 것보다 권력을 통해 무엇을 했는지를 평가하자고 말하며, 측천무후의 시대에 정치나 경제 영역보다 문화의 화려한 개화와 독특함에 주목할 것을 제안한다. 측천무후를 통해 여성적 리더십의 내용을 모색하는 성찰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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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카스트로와 마르케스
앙헬 에스테반, 스테파니 파니첼리 | 예문 | 2012-03-14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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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카스트로와 마르케스
앙헬 에스테반, 스테파니 파니첼리 | 예문 | 2012-03-14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라틴문학의 신화 마르케스, 중남미의 붉은 별 카스트로
그들은 어떻게 40년에 걸쳐 강철 같은 우정을 지켜오고 있는가 -20세기 최고의 ‘문학과 혁명’의 만남, 그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1982년 《백 년 동안의 고독》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아이콘이 되어왔다. 중남미 문학은 마르케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불릴 정도이다. 마르케스를 통해 세계인들은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불리는 중남미 문학세계에 입문할 수 있었다.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는 최근 동생 라울 카스트로에게 자신이 쥐고 있던 모든 권좌를 물려주고서 반세기에 걸친 최고지도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체 게바라와 함께 라틴아메리카에 혁명의 불씨를 피운 혁명가였지만,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대원으로서 최후를 마친 체 게바라와는 달리 가장 장기집권한 권력자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1959년 1월 쿠바혁명 이후 52년간이었다. 이번에 출간된 《카스트로와 마르케스》는 이 두 전설적 인물의 우정에 얽힌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마르케스는 가는 곳마다 늘 화제를 몰고 다녔지만, 그가 쿠바혁명의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우정을 맺고 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피델이 마련해준 마르케스의 저택이 아바나에 있고, 그는 1년 중 많은 시간을 쿠바에서 보낸다. 실제로 마르케스는 “피델이 나보다 먼저 죽는다면 다시는 쿠바에 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공공연히 밝힐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깊다. 좀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피델조차 “마르케스 없는 우정은 상상할 수 없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알고는 있었으나 피델이 마르케스의 마음을 받아들인 1975년부터 본격적으로 친구 관계를 맺어왔다. 사실 두 사람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학적·정치적 위상을 떠나,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친구’가 될 수 있는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출신 국가는 콜롬비아와 쿠바로 다르긴 하지만 둘은 대학도 같은 시기에 다녔고 대학시절 전공도 법학으로 같았다. 물론 피델은 대학시절부터 행동가였고, 마르케스는 법학도이면서도 문학청년이라는 점이 다르긴 하다. 그러나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듯이, 마르케스는 라틴아메리카의 정치적 운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중남미의 미래가 사회주의에 있다고 믿고 있었다. 피델 또한 문학적 취향이 강하고, 작품을 보는 높은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이 책의 저자들은 두 사람의 우정을 순수한 우정의 관점으로만 보기에는 석연찮은 점이 많다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특히 피델을 향한 마르케스의 우정은 집착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지나치게 경도돼 있다고 저자들은 보고 있다. 사적인 관계와 공적인 관계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1959년 피델 카스트로가 체 게바라 등과 함께 소규모 게릴라 대원들을 이끌고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무너뜨렸을 때 전 세계 지식인들은 일제히 환호의 박수를 보냈다. 수백년간에 걸친 스페인·포르투갈의 식민지배, 이후 미국의 간섭과 비호 아래 독재정권이 계속해서 지배하는 중남미에서 반독재·반미제국주의를 들고 나온 쿠바혁명은 지식인들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했다. 변호사 출신의 지적인 이미지, 체 게바라와의 우정으로 드러난 불굴의 혁명정신도 한몫했다. 특히 스탈린주의의 1인 지배에 신물이 나 있던 좌익 지식인들은 쿠바혁명에서 소련에서 구하지 못했던 새로운 희망을 보았다. 당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던 마르케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관여하고 있던 신문과 잡지 등에 쿠바혁명과 피델 카스트로를 ‘찬양’하는 글을 열정적으로 발표했다. 하지만 모든 혁명이 그러했듯이 혁명이 정착되는 과정에서 피델은 언론과 표현의 자유, 정당결성의 자유 등 민주주의의 기본 요건들을 외면하고 무시하기 시작했다. 이에 서방의 지식인들도 서서히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샤르트르와 보바르, 바르가스 요사, 수잔 손탁 같은 이들은 드러내놓고 피델 카스트로와 쿠바혁명 지도자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 책에도 소개되고 있지만 체 게바라마저 피델의 방침에 맞서 마찰을 빚고 결국 갈라서게 되었다. 그런데도 마르케스는 단 한 번도 이 비판의 대열에 동참하지 않았다. 정부의 강압에 못 이겨 쿠바의 유명작가가 반강제적인 ‘자아비판서’를 읽어내려 갈 때도 한마디 항의도 하지 않았고, 지식인들이 피델에게 보내는 항의서한에 서명하기도 거부했다. 평소 ‘사형제도에 절대반대한다’고 천명했음에도 막상 쿠바에서 사형이 집행되자 ‘쿠바가 처한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며 피델을 거들었고, 정치범들에 대한 투옥과 망명조치에도 소극적으로 방관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에 한때 마르케스와 돈독했던 친구들도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2010년 노벨상 수상작가인 바르가스 요사이다. 둘은 한때 중남미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굉장히 가까운 사이였고 요사는 마르케스 문학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쓰기도 했었다. 그런 그가 “마르케스는 피델의 궁정작가”라고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도대체 왜 마르케스는 피델 앞에서는 자신의 신조와 원칙까지 어겨가면서 그를 옹호하려고 하는 걸까? 단순히 친구와 우정을 지키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반세기에 걸쳐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피델이 나눠주는 권력의 달콤함에 빠져 있기 때문인가? 문학과 권력의 공생관계인가? 저자들은 두 사람의 우정에는 순수한 면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결국에는 권력의 필요에 의한 것이 근저에 깔려 있다고 본다. 일종의 공생관계라는 것이다. 마르케스는 《백 년 동안의 고독》《족장의 가을》 같은 작품에서 권력자, 독재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그만큼 그는 권력에 대한 지향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는 작품에서 권력자들을 비판하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권력과 권력자들에 대해 동경하는 심리가 강하게 깔려 있다는 것이 저자들의 분석이다. 마르케스가 스페인에서 프랑스로, 쿠바에서 콜롬비아로, 파나마에서 베네수엘라로, 니카라과에서 유럽으로 날아다니며 사귀었던 친구들 대부분은 대통령 혹은 정부 고위관료들이었다. 이처럼 그는 사회 지도층, 최고위급 외교계에 대해서 강한 집착을 보였다. 한편 카스트로에게는 전 세계에 명망을 떨치고 있는 마르케스의 문학적 명성이 필요했다. 자신의 혁명성과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쿠바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전파해 줄 다재다능한 지식인, 자신의 정치 노선을 합리화하고 정당화시켜줄 지식인, 그 적임자가 바로 마르케스였다. 마르케스는 콜롬비아 정당과 지도층으로부터 장관이나 대사 자리, 심지어 대통령으로 출마하라는 제안을 받지만 지금까지 늘 거절해왔다. 대신 이 나라 저 나라를 다니며 카스트로의 메신저로 활동하면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정치적 행보를 펼쳐나간다. 스스로 인정했듯이 권력에 매료된, ‘날 때부터 음모가’였던 마르케스는 카스트로에게서 자신의 잠재된 정치적 욕망을 채울 터전을 발견했던 것이다. 꼼꼼한 자료와 풍부한 인터뷰 등이 돋보이는 역작 저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방대한 자료를 구해서 읽고 관계자들을 인터뷰 하는 등 꼼꼼하게 작업했다. 카스트로와 마르케스가 행한 수많은 언론과의 인터뷰 내용을 그대로 실었을 뿐더러, 바르가스 요사·파블로 네루다·레이날도 아레나스·호세 사라마고·수잔 손탁 등 세계적인 지식인들의 증언을 통해 두 사람의 관계를 면면이 밝힌다. 쿠바와 카스트로에 대해 마르케스가 했던 연설과, 마르케스와의 관계를 공개적으로 인정한 카스트로의 발언. 이러한 정보들은 대부분 관련된 사람들에게서 저자들이 직접 입수한 것이다. 마르케스가 쿠바를 비롯한 중남미 정치에 대해 피력한 발언이나 인터뷰도 상당히 많이 실려 있다. 카스트로가 마르케스와 그의 문학에 대해 언급한 자료가 소개됨은 물론이다. 저자들은 두 사람을 아는 수많은 지인과 작가, 기자, 유럽 및 중남미 정치가 들을 개인적으로 만나 인터뷰했다. 이 책은 콜롬비아 정치의 격동기였던 1948년, 폭력과 피가 난무하는 그 역사적 현장에서 두 사람이 당시에는 서로 알지도 못했지만 같은 장소에 있었다는 사실을 50년이 지난 후에 깨닫게 되는 사연(1부의 ‘유년기의 두 신神’), 체 게바라가 설립을 주도한 통신사에서 기자로 활동한 사연(1부의 “나는 사회주의 세상을 꿈꾼다”), 쿠바의 예술가 및 정치가들과 함께 중남미 최고의 영화 학교를 설립한 사연(3부의 ‘꿈은 영화다’) 등을 주변인들의 증언으로, 실제 주인공들의 목소리로 생생하게 전달한다. 이 밖에도 마르케스가 쿠바혁명에 충성한 대가 혹은 피델과의 친분의 증표로 받은 아바나에서 가장 멋진 동네에 자리 잡은 저택에 대한 이야기(2부의 ‘우정, 사랑보다 값비싼 보석’), 카리브 지역 권력층의 막후를 들여다보면서 파나마 운하의 주인이 바뀌는 과정(2부의 ‘젊은 스페인 총리와 사귀다’)·니카라과 좌익 게릴라인 산디니스타의 탄생 과정과 군사적으로 발전하며 승리한 과정(2부의 ‘새로운 동맹자, 산디니스타’) 등 역사적 사건의 이모저모를 들여다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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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클릭! 조선왕조실록
이남희 | 다할미디어 | 2008-10-28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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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클릭! 조선왕조실록
이남희 | 다할미디어 | 2008-10-28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CD-ROM 조선왕조실록』 디지털화 작업에 직접 참여했던 저자가 인터넷 '클릭!'을 통해 조선왕조실록에서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사회문제들의 해결책을 찾아보려는 시도이다. 살인, 인사청탁, 언론자유, 탄핵, 이혼과 재혼, 자연재해, 국제무역, 외국인, 의녀 등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슈들을 선택해서 조선왕조실록의 원문을 인용해 가며 당시의 해법을 제시한다. 인용한 실록 기사에는 충실한 전거를 덧붙여, 그 분야의 관련 자료로 이용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각 꼭지는 하나의 독립된 스토리를 가지고 조선시대와 현재를 아우르고 있어서, 드라마나 영화의 스토리텔링 구상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조선왕조실록'으로 오늘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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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툰드라 네네츠 인들의 민요와 민속
엘레나 푸쉬카료바 | 써네스트 | 2013-04-05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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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툰드라 네네츠 인들의 민요와 민속
엘레나 푸쉬카료바 | 써네스트 | 2013-04-05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지구상 마지막 순록 유목민 네네츠 인들의
구전 민요와 민속의 정리 네네츠인들은 시베리아의 툰드라 지대에 살고 있는 순록 유목민인다. 이들은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순록유목을 하면서 살고 있다. 시베리아라고 하면 알타이 산맥 동쪽의 드넓은 시베리아를 생각하지만 네네츠 인들이 살고 있는 곳은 러시아의 서북부에 있는 야말-네네츠 자치주이다. 이곳의 풍부한 가스 자원 등은 요새 우리에게 많은 관심을 갖게 만든다. 흔히 이들을 지구상 마지막으로 남은 순록 유목인이라고 한다. 그만큼 저들의 전통도 오래되었으며 그 생활문화도 거의 변화가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이곳도 최근에는 많은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자원이라는 것 때문이다. 그동안 전혀 정부나 자본가들에게서부터 관심을 받지 못하였지만 풍부한 천연자원이 있다는 소식 때문에 정부나 자본가들 그리고 이제는 외국인들까지도 관심을 갖고 돈이 들어가고 있다 .아마도 이들 네네츠 인들의 전통적인 생활도 멀지 않아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현재까지 지켜내고 있는 전통을 보존하여서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게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서쪽으로 전파된 샤머니즘의 이해 이 책은 바로 네네츠 인들의 사라져가는 전통을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은 여러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세계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네네츠 인들의 전통 민요와 민속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들에게 글자가 없기 때문에(러시아어를 가차해서 쓰고 있지만) 그들의 민요와 민속은 여전히 구전되어 전해지고 있는데 이것을 녹음을 하거나 글로 남기는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곧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 책은 외부의 제 3자가 정리한 책이 아니라 바로 네네츠 자신이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깊이 이해하면서 쓴 책이다. 바로 저자 자신이 순록 유목민의 가정에서 태어나서 자랐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네네츠 인들의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심을 가지고 그들의 문화를 살펴보고 있다. 셋째로, 대한민국에서는 거의 최초로 시베리아 민족, 그 중에서 툰드라 지대의 유목민의 민요를 정리한 책이다. 이것은 대한민국 인류학 연구자들에게는 또하나의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특히 샤먼과 관계된 부분은 바이칼 호수 부근에서 출발한 샤머니즘이 서북부로 이전하면서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보여주면서 동쪽으로 이전되어 우리에게 전해진 샤머니즘과 비교를 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될 수 있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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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 권으로 읽는 세계사
오귀환, 이강룡 | 페이퍼로드 | 2013-05-03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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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 권으로 읽는 세계사
오귀환, 이강룡 | 페이퍼로드 | 2013-05-03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서구와 승자 중심의 편향적 시선이 아닌
우리 입장에서, 우리 시각으로 동양과 서양의 역사를 개념 있게 읽는다! 맥락과 시대정신으로 통찰한 세계사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는 거대 하천 유역에서 관개농업을 바탕으로 비슷하게 고대 문명을 발달시켜 갔는데, 왜 한쪽은 작은 도시국가끼리 서로 치고받으며 흥망을 거듭한 반면, 다른 한쪽은 통일왕조에서 3,000여 년이나 비슷한 문명을 유지하며 장수할 수 있었을까? 프랑스는 서유럽 최대의 농업국가이자 유럽의 중심이면서도, 또한 로마 문명의 보다 직접적인 수혜자로서 훨씬 유리한 조건을 지녔음에도 왜 영국에 뒤처져 만년 2인자에 머문 것일까? 서구의 강요로 개항한 일본은 어떻게 불과 20여 년 만에 이웃 조선에 대해 개항을 강요할 정도로 빠르게 힘을 키웠을까? 게다가 국가 통일을 이룰 때마다 이웃나라를 침략하는 군국주의를 거듭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한 권으로 읽는 세계사』는 세계 역사 속 주요 사건과 인물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는지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서술의 방점을 찍는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저자들은 역사를 움직이는 힘으로써 ‘시대정신’에 주목한다.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려면 역사의 주체와 그 주체를 둘러싸고 있는 조건이 상호 조응해서 어떻게 변화했는지, 그 맥락을 살피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중국을 예로 들면 인구 증가가 시대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북방 유목민족과 남방 농경민족의 상호관계 속에서 중국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농업과 철 산업 등 주요 산업의 발전이 역사에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지, 청나라와 영국의 무역 갈등이 어떻게 현대 중국의 개막으로 이어졌는지 설명한다. 역사 속 피해자와 패배자, 인간 욕망에 주목하다 인류는 최초로 잉여가 발생한 신석기 이래 21세기까지 욕망과 능력의 불균형을 해소하는 방법 가운데 인간능력을 더 키우는 데 골몰했다. 그 결과 생존의 논리로, 승패의 논리로, 흥망의 논리로 역사는 누군가를 희생시켰고 피해자와 패배자의 역사는 가려졌다. 『한 권으로 읽는 세계사』는 서구 중심, 승자 중심으로 설정한 기존의 역사 주체를 보다 넓히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저자들은 가해자와 승리자의 욕망 반대편에서 어떤 피해자와 패배자의 역사가 이뤄졌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인다. 승자와 가해자들이 이뤄낸 성장과 패권을 비판적으로 살피고, 그에 희생된 약자의 현실과 약자의 눈으로 세계사를 고찰하며 잘못된 선택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령 제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경우 서구 열강에 빛을 진 약소 채무국으로 전락했다. 과테말라, 온두라스, 콜롬비아 등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미국의 경제권에 완전히 예속된 일명 ‘바나나 공화국’이 되었다. 아프리카 국가들도 예외는 아니다. 제국주의에 철저히 수탈당했던 아프리카 국가들은 독립 후 대부분 내란으로 빠져들어 국민들은 가난에 허덕이고 있다. 또한 저자들은 현대사 서술에 있어서 자연 조건이라는 씨줄과 인간 욕망이라는 날줄로 단단하게 엮어진 시대상을 내밀하게 관찰한다. 21세기 십자군 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종교 갈등, 신자유주의의 숨겨진 진실, 미디어 환경의 변화로 야기된 21세기 신인류, 인구 70억 명 시대가 개막한 지구에 닥친 7가지 도전 등을 이야기하며 공생적 미래를 위해 고민한다. 『한 권으로 읽는 세계사』는 정치 및 경제 변화를 중심으로 한 통사적 구성이지만 교과서를 통째로 압축한 단순한 요약본이 아니다. 주요 사건과 내용을 요약하면서도 균형 잡힌 해석을 통해 전체 의미를 새롭게 발전시킨다. 무엇보다도 저자들은 세계를 하나의 체제로 인식하고 그 속에서 의미 있는 사실들을 찾아 현재의 모습을 가능케 한 동력이 무엇인지 발견하고자 노력했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해당 시대의 특수적 상황은 무엇이고 해당 시대 사람들은 어떠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상황과 관심 속에서 누가, 또는 어떤 사건이 왜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바꿀 단초가 되었는지에 대해 통시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책은 풍부한 사진과 그림, 도표, 지도를 삽입해 세계사 읽기의 흥미를 더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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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 고대사와 그 역적들
김상태 | 책보세 | 2013-05-31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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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 고대사와 그 역적들
김상태 | 책보세 | 2013-05-31 | 공급 :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11-21) 대출:0, 예약:0, 보유수량:1 지원기기:
강단ㆍ진보ㆍ재야사학이 협잡하여 중국 ‘동북공정’에 팔아먹은 우리 고대사
《엉터리 사학자 가짜 고대사》로 신랄히 강단 주류 고대사학계를 비판했던 저자가 다시 《한국 고대사와 그 역적들》을 통해 강단사학은 물론 진보?재야사학계의 심각한 고대사 왜곡 문제를 비판하고 나섰다. 전작에서 보여준 학문적 상식과 과학의 틀을 그대로 가져와 진보?재야사학계를 대표하는 이이화와 강만길, 그리고 박노자, 이덕일, 《역사비평》, 경향신문, 역사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 등이 어떻게 중국 동북공정에 복무하는지 윤내현 교수의 주요 논문을 통해 그 진실을 추적한다. 놀랍게도 이들은 하나같이 윤내현 교수에 의해 무참히 깨진 논쟁들을 다시 살려와 반복하는가 하면 아예 침묵으로 일관한다. 심지어 이들 엉터리 사학자들은 학문적 논쟁을 무시하고 윤 교수를 학교에서 쫓아낼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 책 1장은 고조선의 연구와 상식의 몰락을 그리고 있다. 주류 고대사학계의 거두 이기백은 ‘진실’과 ‘민족’을 표방하는 석학으로 알려져 있지만 고대사에 관련해서는 무지한 잡배나 다름없다. 그의 저술과 논문을 통해서 이를 살펴보는데, 그는 차후 민족사학을 탄압하고 음해하는 원죄적 전통을 세운다. 또 주류 고대사학계 최고 거물인 노태돈은 중국이 동북공정을 시작하기 10년도 전인 1990년에 산해관에 있는 만리장성을 요하까지 늘려놓았다. 이는 중국 학자들의 글을 그대로 옮긴 쓰레기 같은 논문이다. 중국은 이 논문을 바탕으로 차후 만리장성을 2만 리까지 늘리고 만다. 이런 일을 필사적으로 자행한 노태돈과 그의 제자 송호정의 만행을 그들의 논문을 통해 살펴본다. 재야사학계의 원로 이이화는 애하첨고성과 호산장성을 고구려성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중국의 유적이라 주장하는 중국 동북공정을 비판한다. 그러나 애하첨고성과 호산장성을 중국 것이라 주장하는 진범들은 노태돈과 송호정이다. 하지만 이이화는 이들을 놔두고 엉뚱한 곳에서 호통을 친다. 나아가 이이화는 완전한 학문적 파산에 처하고 만다. 그는 평생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주장하다 지금에 와서는 낙랑군이 한반도가 아닌 중국 북경 근처의 산해관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주류 고대사학자들이 왜 한국 유적을 중국 유적이라 우기는지, 왜 만리장성을 늘이는지, 이이화가 무엇을 착각하고 있는지 그들의 책과 논문을 통해 살펴본다. 저자는 이이화의 학문적 파산이 진보사학 내부에 준비되어 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2000년에 진보사학의 아성인 ‘역사문제연구소’의 기관지 《역사비평》은 송호정의 저질 논문을 게재하고 말았다. 이는 근현대사를 전공한 진보사학이 자신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고대사에 대해 주류 고대사학계를 맹목적으로 추종한 것이다. 이러한 사연의 앞뒤를 살펴보고 저자는 ‘역사문제연구소’ 초대 이사장이자 《역사비평》 편집위원이기도 한 현 서울시장 박원순에게 질문을 던진다. 강만길과 박노자는 저항적 반식민사학적 전통에 있어 신채호의 적자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신채호를 제거하려고 한다. 그러나 강만길과 박노자는 고조선에 관한 문외한들일 뿐이다. 즉 신채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런 이들이 터무니없는 논거로 신채호를 비판한다. 이 비상식적 역설 또한 추적한다. 진보사학이 고조선에 대해 무지하면서도 민족사학을 거부하는 데는 깊은 사연이 있다. 일제 시기부터 100년에 걸친 민족사학과 사회경제사학의 갈등에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내면을 살펴보는 것은 물론 나아가 임지현을 비롯한 현 시기 진보사학의 자가당착을 분석한다. 역사문제연구소와 민족문제연구소는 같은 진보사학자들의 단체다. 그런데 역사문제연구소는 자신들이 간행한 책에 주류 고대사학자인 주보돈의 논문을 게재함으로써 유명한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과 ‘한국 고대 국가가 삼국시대 중기까지 국가를 이루지 못한 미개사회였다’는 이론을 받아들인다. 이는 사실상 일제 식민사학의 핵심이며 임나일본부를 용인하는 것이다. 도대체 고대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진보사학자들이 왜 이런 무모한 짓을 저지르는가? 한편 친일파 청산에 앞장서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과 <백년전쟁>을 만들어내면서 역사문제연구소의 식민사학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이 없다. 아울러 이 모순도 살펴본다. 2장에서는 일제시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고조선 연구를 식민사학과 주류 강단고대사학의 소고조선론과 민족사학의 대고조선론으로 대별하여 살펴본다. 특히 저자는 1980년대 이후의 과정에 주목한다. 일반 국민들은 잘 모르고 있지만 소고조선론의 학문적 성과는 지난 100년간 한 줌도 되지 않았다. 반면 신채호 이후 대고조선론은 북한의 연구와 남한의 대학자 윤내현으로 이어지며 완벽하고 탄탄한 기반을 갖추었다. 고조선에 대한 학설로서는 대고조선론이 유일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주류 고대사학계는 이 사실을 철저히 은폐하며 대고조선론을 탄압했다. 대고조선론이 얼마나 과학적인지, 반면 주류 고대사학계의 음모가 얼마나 간교하고 잔혹했는지 그간 학계의 논문들을 통해서 살펴본다. 3장에서는 윤내현 교수의 《고조선 연구》에 대한 표절 시비 문제를 다룬다. 80년대 이후 등장한 윤내현의 대고조선론은 거대한 체계와 치밀한 논증으로 주류 고대사학계의 소고조선론을 뿌리채 흔들었다. 학문적으로 대응할 능력이 없는 주류 고대사학계는 윤내현을 모략하여 표절자로 몰아붙였다. 한국 사학계 최고·최대 잡지인 《역사학보》는 윤내현을 표절자라고 음해하는 이형구의 논문을 그대로 실었다. 유수한 역사잡지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것인데 놀랍게도 이 황당한 음해는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다. 이 음모의 허구와 의미를 파헤친다. 4장에서는 《코리안 루트를 찾아서》를 펴낸 경향신문과 이형구의 관계, 그리고 재야사학계의 현주소를 가늠한다. 경향신문은 2007년 이형구와 더불어 중국 북동지역을 24일간 답사하고 이것을 35회에 걸쳐 연재해, 2011년 단행본 《코리안 루트를 찾아서》를 출간했다. 내용은 중국 동북 지역의 문명이 한국의 유구한 고대문명이라는 것인데, 이는 중국이 주장하는 동북공정을 좇는 이론이다. 또 이형구는 동북공정을 주동하는 학자들과 밀접한 인맥을 이루고 있으며 그들의 이론을 답습한 학자다. 하지만 경향신문은 이를 몰랐다. 이 기막힌 사연의 내막을 살펴본다. 그리고 소고조선론과 대고조선론을 둘러싼 재야학계와 대중의 입장을 정리했다. 저자는 과도한 것들을 정리하고 바람직한 논쟁을 위해 제언을 한다. 한편 이덕일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는 민족사학을 주장하며 식민사학을 비판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는데, 실제로는 엉망진창이다. 따라서 이를 따르는 대중은 헤어날 수 없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이는 신채호, 윤내현 등 선학들이 뼈를 깎아 만든 대고조선론을 오염시키고 내부에서부터 붕괴시키는 것으로 최남선 이후 가짜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친일파들이 민족주의를 팔아먹는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저자는 그들의 이면을 분석한다. 5장에서 저자는 고조선의 심리학을 들여다본다. 우리 국민들은 실제로 고조선을 잘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의식의 바닥에는 고조선과 한국 역사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숨어 있다. 왜 이런 일이 생겼고 이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가를 살펴본다. 6장에서 저자는 윤내현을 어둠 속에 빛나는 상식의 빛으로 숭앙한다. 윤내현은 남한에서 신채호를 잇는 단 한 명의 학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상과 국수주의로 점철된 대고조선론을 과학과 상식의 학문으로 건립한 학자가 바로 윤내현이다. 그의 업적은 단순히 학문적 성과에 그치지 않는다. 학자의 삶과 성실, 무엇보다 상식과 과학을 수십 년의 세월 속에서 실천해온 과정이 더욱 중요하다. 그것은 방향을 상실한 우리 사회의 진정한 사표다. 실로 어둠 속에 빛나는 한 줄기 상식의 빛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윤내현의 의미를 조명한다. 이 책을 통해 저자가 주장하는 논점의 핵심은 역사를 이념이나 이권 문제로 다루지 말고 오로지 상식과 과학의 차원에서 접근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고대사학계의 논문과 이론들이 얼마나 공상과 비상식과 억지가 난무하는지 제대로 볼 수 있으며, 진정한 과학으로서의 고대사를 재정립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는 동시에 우리의 삶도 올바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